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소년 이순원의 호기심이 작가 이순원의 상상력을 빌려 ‘고래바위’의 전설을 만들다
이순원의 『고래바위』는 고향 마을 큰 산에 실제로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는 ‘고래바위’에서 시작되었다. 작가 이순원은 어린 시절 ‘고래바위’에 올라 앉아 고래를 타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산 위에 있는 고래 바위가 어떻게 바다에 가서 바다의 고래를 만날 수 있을까?’ 소년 이순원의 호기심이 작가 이순원의 상상력을 빌려 ‘고래바위’의 전설을 만들었다.
이순원의 『고래바위』는 바로 ‘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이야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산 위의 고래바위가 바다로 가는 꿈을 꾸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룬다. 이순원의 『고래바위』는 바로 ‘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산 위에 있는 고래바위가 어떻게 바다에 갈 수 있을까? 작가 이순원은 고래바위를 바다로 보내기 위해 기발한 발명을 해내거나 신비의 힘을 끌어오지 않았다. 그대신 그는 자연이 바위에게 하는 일을 보이는 그대로 성찰하였다. 자연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기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기적
거대한 바위가 어떻게 바다로 갈 수 있을까?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자연을 한번 들여다보면 바위가 부서지고 깨져서 돌멩이가 되고 모래가 되고 먼지가 되는 일은 늘 일어나는 일이다. 지구 역사에서는 대륙이 이동해왔고 우주 역사에서는 별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도 한다. 자연에서는 일상적인 일이 인간에게는 그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작가는 거대한 고래바위가 한 알의 명개흙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험난하고 긴 여정을 아주 쉽고 담백하고 정직하게 들려준다. 바위와 동물을 의인화한 우화의 세계에 ‘정직’하다는 수식어를 붙이게 되는 이유는 자연과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고래바위의 여정은 개인의 꿈과 삶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
이순원이 보여주는 바위의 삶은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세계가 아니라,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자연스런 삶의 세계다. 거대한 바위가 한 알의 명개흙이 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도대체 몇 번이나 깨어지고 부서져야 할까? 그때마다 바위는 얼마나 아팠을까? 깨어지고 부서지면서도 바위로 산다는 것의 기쁨은 또 무엇일까? 그 오랜 시간 동안 바위는 누구를 만나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떤 꿈을 꾸었던 걸까? 작가 이순원이 들여주는 고래바위의 여정은 우주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개인의 꿈과 삶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자연과 삶에 대한 정직한 성찰
작가 이순원은 자연과 성찰이라는 치유의 화법으로 우리의 양심과 영혼을 치유해왔다. 자연과 삶에 대한 그의 정직한 성찰은 『고래바위』를 읽는 내내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게 만든다. 예컨대 ‘이 세상에 모든 물은 흘러 흘러 바다로 모인다’, ‘바위 위에 실처럼 가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등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당연하고 정직한 구절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모든 물이 바다로 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으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바위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금이 가고 부서지고 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연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정직하게 읽어내고는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아주 오래된 영혼을 가진 사람의 지혜와 사랑의 향기
‘고래바위’라는 제목만 보아도 그의 지혜와 통찰력이 모두 자연에서 온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바위에 이름을 지어주고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주 오래된 영혼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이순원의 『고래바위』를 읽으면 아주 오래된 영혼을 가진 사람의 지혜와 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어쩌면 고래바위를 비롯한 모든 바위는 바다로부터 온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고래바위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래바위가 거대한 몸집 그대로 바다로 가려고 했다면 영원히 그곳에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고래바위에서 너럭바위로, 너럭바위에서 뾰족바위로, 뾰족바위에서 징검돌로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며 고래의 꿈을 잊지 않았기에 명개흙이 되어 바다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자연의 섭리를 꿈의 위력으로 설명
다른 한편으로 이순원의 『고래바위』는 자연의 섭리를 꿈의 위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래바위가 부서지고 깨어져서 명개흙이 되어 바다에 다다르는 것은 고래바위가 지닌 꿈의 위력인 것이다. 송어와 연어가 바다로 갔다가 다시 강으로 돌아오는 것도 송어와 연어가 견지하는 회귀의 꿈 때문이다. 작가 이순원은 『고래바위』에서 꿈과 의지와 시간과 노력과 자연의 섭리가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지를 쉽고 간결하고 정직하게 통찰하고 있다. 작아지지 않고는 바다로 갈 수 없는 고래바위와,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회귀할 수 없는 송어와 연어는 모두 자연의 섭리 안에 있다. 인간의 꿈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변화는 꿈을 이루는 여정
처음 번개를 맞아 쪼개질 때 고래바위는 죽을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두 번째 변화일 뿐이다. 애초에 고래바위가 작은 새를 만나 바다 이야기를 듣고 바다로 가는 꿈을 갖게 되면서부터 이미 고래바위의 삶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래바위는 깨어지고 부서지고 옮겨질 때마다 괴로워했지만 사실 모든 변화는 꿈을 이루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없이 많이 부서지고 깨어지고 옮겨 다니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꿈을 견지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꿈 꾸는 자는 모든 변화를 꿈으로 가는 여정으로 즐길 것이다. 꿈이 없다면 변화는 언제나 시련이고 시련은 늘 고통스럽다. 작아지지 않는 바위는 바다에 갈 수 없듯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꿈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자연의 회귀본능과 개체의 꿈을 결부시키다
또한 이순원 작가는 『고래바위』를 통해 자연의 회귀본능과 개체의 꿈을 결부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송어와 연어가 산란을 위해 강으로 돌아오는 회귀본능이 송어와 연어의 꿈이듯이, 고래바위가 바다로 가는 꿈을 꾸는 것은 고래바위의 회귀본능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꿈을 꾼다는 것은 우리가 원래 온 곳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유롭고 평화롭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작가의 말대로 꿈이 곧 회귀본능이라면 사람들은 자유롭고 평화롭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온 것이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름답고도 슬프다. 우리는 아직 미완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시선에 따르면 꿈꾸는 것이 우리의 본능인 셈이니 우리에게 희망은 무한하다.
우화가 주는 풍자의 즐거움
딱히 꿈에 관한 해석이 아니더라도 이순원의 『고래바위』를 읽는 즐거움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위와 동물들의 삶을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모두 자연과 삶에 대한 깊고 진한 작가의 통찰력 덕분이다. 작가는 우화가 주는 풍자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모두 꿈의 위력을 지닌 고래바위
불경기 때문에 또는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요즘, 이순원의 『고래바위』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꿈의 위력을 지닌 고래바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순원 글
자연과 성찰이라는 치유의 화법으로 양심과 영혼을 일깨워 온,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 「수색, 어머니 가슴속으로 흐르는 무늬」로 동인문학상, 「은비령」으로 현대문학상, 「그대 정동진에 가면」으로 한무숙문학상, 「아비의 잠」으로 효석문학상, 「얘들아 단오가자」로 허균문학작가상, 「푸른 모래의 시간」으로 남촌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아들과 함께 걷는 길』, 『19세』, 『나무』, 『워낭』 등 자연을 닮은 작품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11년에는 이탈리아 작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의 그림책 『눈 오는 날』을 강원도 사투리로 번역해 토박이 말의 진수를 선보였다.
먼저 그곳에 있던 바위들은 온몸에 이끼를 덮은 채 둥글둥글한 모습이었다.
지금 막 깨지고 부서지며 떠밀려온 자기만 바짝 날이 서 있었다.
P 57
뾰족바위는 이렇게 작은 친구들도 잃어버린 꿈을 찾아 모험 같은 여행을 한다는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마도 그건 목숨을 건 여행일 것이었다.
P 91
이 강엔 자기처럼 바다를 꿈꾸는 징검돌도 있고,
이른 봄 강둑에 피어난 꽃들의 향기를 따라 바다로 나가는 어린 고기들도 있고,
가을이면 가깝고 먼 바다에서 다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알을 낳으러 목숨을 걸고 올라오는 어미 고기들도 있었다.
새로운 삶과 희망이 강과 함께 있었다.
P 113
어릴 때 바다가 보이는 마을 큰 산에 고래를 닮은 커다란 바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래바우’라고 불렀고, 큰 산의 이름도 ‘고래바우’가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고라우’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마을이어도 다른 마을처럼 먼, 큰 산에 있는 바위여서 열 살쯤 되어서야 처음 그 바위를 보았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가재를 잡으러 갔다가 친구들과 함께 고래바위 등을 타고 앉아 그대로 바다로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가 등에 올라앉았을 때 바위는 살아있는 고래처럼 바다를 향해 몸을 움직이고 꼬리를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어른이 되어 다시 고래바위를 찾아가 보게 되었습니다.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산 위에 있는 고래 한 마리가 바다로 가자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 어릴 때는 그것만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어 가만히 생각하니 시간의 문제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산 위에는 고래바위처럼 큰 돌이 많고, 계곡 입구엔 큰 돌이 부서져 내린 각진 돌이 많았습니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오며 돌들은 큰 돌에서 더 작은 바윗돌, 징검다릿돌, 빨랫돌, 담을 쌓는데 쓰는 호박돌, 주먹돌, 그보다 작은 조약돌, 공깃돌, 다시 그것이 닳고 부서진 왕모래와 작은 모래가 되었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다 버린 티끌 같은 명개흙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온몸으로 바다를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산 위의 고래바위가 자기를 닮은 바다의 고래를 만나러 오는 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한세상을 사는 일도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 가졌던 마음 안의 욕심들을 살아오는 길섶에 하나하나 버리고 비워가며 마침내 더 큰 세상을 만나고, 더 큰 자기를 완성해 가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 내 고향 큰 산꼭대기에 바다를 향해 누워 있는 대왕고래 한 마리를 내 마음 안의 강물을 통해 여러분 마음 안의 강물로 띄워 보냅니다. 부디 이 고래가 길고 긴 여정 끝에 여러분의 바다에 무사히, 그리고 기쁘게 닿기를 바랍니다.
2012년 가을 이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