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지만 가슴 저미는 서사
안다는 말이 많았어요. 소소는 듣기만 했지요.
-본문 중에서
그림책 『울타리 너머』는 안다와 소소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모습에서 시작됩니다. 안다는 소년입니다. 소소는 꼬마 돼지지요. 둘은 친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안다는 소소한테 어울리는 옷이 뭔지 알았어요. 뭘 하고 놀면 좋을지도 알았고요.
-본문 중에서
그런데 그림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다는 보라색 옷을 입으라고 하고 소소는 주황색 티셔츠와 연두색 바지를 입고 있지요. 놀 때도 서로 다른 것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그림책 『울타리 너머』의 간결한 서사는 그림과 대비되는 반어법으로 소소의 슬픔을 절절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안다와 소소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친구는 아닌 것입니다.
소소가 산들이를 만나다
그러던 어느 날 안다의 사촌이 놀러 옵니다. 그러자 안다는 사촌과 노느라 소소를 잊어버립니다. 소소는 집밖으로 산책을 나갑니다. 소소는 들에서 산들이를 만납니다. 산들이는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있습니다. 산들이는 야생 멧돼지입니다. 소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산들이가 좋습니다. 둘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합니다.
소소와 산들이가 만나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소소와 안다가 이야기하던 장면과 엄청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안다와 함께 있을 때 소소는 안다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닙니다. 하지만 산들이과 만난 소소는 산들이처럼 네 발로 걸어 다닙니다. 무엇보다 안다와 함께 있을 때 소소는 불행해 보입니다. 하지만 산들이와 함께 있을 때 소소는 행복해 보입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아름다운 일러스트레이션
마리아 굴레메토바의 그림은 신인 작가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습니다. 이토록 주인공의 감정을 잘 담아내는 그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정이 뚝뚝 묻어납니다.
마리아 굴레메토바는 단 한 장의 그림만으로 독자의 마음을 훔칠 수 있을 만큼 탁월한 재능을 지닌 신인 작가입니다. 누구나 그녀가 그린 그림을 보면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날 것입니다.
다양한 의미를 발견하는 드라마
소소와 안다와 산들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상념을 선사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참된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고, 누군가에게는 폭력과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문명과 자연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울타리 너머』는 꼬마 돼지 소소의 아름답고 가슴 찡한 드라마로 저마다 다른 의미와 다른 가치를 발견하게 만드는 그림책입니다.
마리아 굴레메토바 글, 그림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일러스트레이터였고 어머니는 예술사를 전공한 사학자였어요. 집 안 곳곳에 아름다운 그림책이 넘쳐났는데, 그 그림들에 매혹되어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습니다. 따뜻한 날이나 여름휴가 기간에는 부모님과 함께 어딘가로 나가 풍경을 그렸어요. 아버지가 조용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어 하는 날에는 어머니와 그림을 그렸지요. 매주 일요일에는 소피아에서 가까운 산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은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산으로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그런 경험이 이 책의 배경이 되었지요.
소피아에 있는 예술아카데미에서 텍스타일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을 나누는 것에 매력을 느껴 앙글리아 러스킨 대학원 과정에 참여하였고 그림책 작가가 되었어요. 지금은 비가 많이 내리고 야생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오리건주 유진에서 남편과 두 아이들과 살고 있답니다.
이순영 옮김
강릉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이루리와 함께 북극곰출판사를 설립하고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번역한 책으로는 『당신의 별자리』 『사랑의 별자리』 『안돼!』 『곰아, 자니?』 『공원을 헤엄치는 붉은 물고기』 『똑똑해지는 약』 『우리집』 『한밤의 정원사』 『바다와 하늘이 만나다』 『우리 집에 용이 나타났어요』 등 30여 편이 있습니다.